수월의 한국조각사 계보的의의

조소가 수월 김만술선생이 한국근현대조각사에서 가지는 계보的 의의

조소가 수월 김만술선생이 한국근현대조각사에서 가지는 계보的 의의(성파는 아들에게 처음 밝히다.)

수월 김만술 선생의 조각인생 시작은 김복진係불교조각 이수자에 해당된다. 김복진의 사사제자, 제자들은 불상조각을 잘 남기지 않거나 대부분 특별히 한바가 없다. 단지 작고뒤에 제자들이 법주사 미륵불을 마무리 함이 잘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럼으로 수월선생은 다른 제자들과 달리 일본불사의 계보를 진일보 시켰다고 할수 있어 이채롭기만 하다. 

김복진 선생이 비록 일본 불사스승들의 감화로 불교조각을 시작했지만, 그가 애써 석굴암을 방문한 것처럼, 그는 나아가서 자신의 고향 경주의 고대불상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켯고 우리 고유로서 나아가 심화시킨 불상은 전국 곳곳에 숨어있다.

 정관 김복진선생과 사이토소원 선생의 영향을 주축으로 권진규선생의 개인적인 창작보다 히나고 지츠조처럼 공공 기념조각에 주로 매진했고 이는 부양가족이 많은지라 생업이 주된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이 때문에 극사실계열과 고전적인 향토주제를 가진 창작물이 많은 것이다. 때문에 헤라자국이 용이한 지라, 손터치로 이어진 브루델의 영향이 깃든 의도적인 작품성을 둔 흉상과 인물상이 적지만,  해방은 누구나 느낄수 있다. (해방은 얼굴이 극사실로 표현 머리카락은 세심한 헤라자국이 없으며 수월선생의 얼굴을 모티브로 하였고,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정관 김복진과 사이토 소원은 얼굴을 극사실류로 다작을 남겼다.) 성파가 작품성격의 근거사항으로 오늘날 없어진 황성공원 전몰장병추모탑의 시멘트 인체상을 본 소감이"부르델 냄새가 너무난다"고 아들에게 지칭해준 바가 있다.
수월선생이 자신의 조각스승으로 지칭한 분이 사이토 소원(영국왕립미술원 조소과로 잘 알려졌지, 부르델선생께 배웟다는 내력은 일본에서도 대중적으로 잘 모르는 모양이고 사사한 제자들중 고모리 쿠니오선생이 언급함을 일본예술원 자료에서 간신히 남겨 알수 있었다.)임을 성파한테 인지시켜 줫다는데서 한국근현대조각사의 엄청난 이슈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였던 김복진 선생과 일본에서 배웟다는 것이 어찌하다보니 의의를 물어 봐줄수도 없고, 자신은 자랑스레 꺼내놓은 적이 거의 없었다고 봐야한다. 지방에서는 중앙계보다 더욱첨예한지라 약력에도 간단한 김복진선생의 제자임을 언급할 엄두를 못낸 것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성파가 구조사란 명칭을 들은바가 있다고 첫질문 이후에 알려줫고, 구조사는 학교정규과정의 성격보다 "조각미술단체(조소연구소란 명칭처럼 조소적인 성격이 더 강했다. 조소미술단체라고 볼수도 있다.)"로서, 일본 웹의 미술평론에도 적혀져 있었다. 웹에서도 히나고 지츠조 사사한 분이 잘 찾아지지 않았고 구조사는 사이토 소원께 사사한 주축들이 대다수 임을 알수 있다. 성파가 사이토 소원을 사사로서 봐야 한다고 함은 공연한 빗말이 아님을 증명시켜 준 것이다. 국내에는 히나고 지츠조 선생이 더 알려져 있었다. 또한 일본에서 제일 큰 기념물을 남긴 까닭에 히나코 지츠조 조각연구소라 약력을 그렇게 쓰신것인지 모르나, 그래서 미술사학계가 거의 다 모르는 비밀에 부쳐진 것이다.

 교수에서 탈피 주된 작품을 위한 전업작가로서 비운의 생을 자살로 마감한 권진규선생의 브루델 계보의 가치를 중앙에서 다시금 주목 받았음에도, 또 하나의 숨은 브루델 계보로 수월 선생은 지방에서 은둔의 작가처럼 미술출판계에서도 소원해진 것이나, 한국 첫 경주'예술학교'의 창립후원 교수(2번 역임)이자  또한 한국 첫 근대조각가 정관係의 南山에 서린 佛氣를 고향삼아 서울상경을 접고 경주예술의 자존심으로 영원히 영남 첫 현대조각가라는 평가로 남아있게 하였다.
 그는 성파에게 조각공원의 염원을 유훈삼듯 안겨줫고,  부르델 학파 사이토 소원係의 수월은 "명예는 사기성이 있고, 작품이 좋아야 한다. 작품을 부지런히 하라" 늘 하던 말씀들 끝에 성파의 조각스승을 위한 水月흉상제작을 끝으로 임종했다.
이처럼 화려한 명예속에도 명예를 지엽적인 것으로 아셨기에 한동안 잊혀진 조각공원의 조소가로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