雕塑근현대미술사비밀

  • 1수월 선생은 초기부터 죽을 때까지 인체 사실에 전념 하였다.
    수월 김만술은 불교 조각만 하지는 않았다.

    성파는 수월 선생이 가진 '인체 사실주의'및 '흉상'과 '종교미술'에도 기어하였다.
    성파 장용호도 불교 조각을 많이 했으나, 수월선생처럼 크리스천의 주문을 거절하진 않았다.
     
    수월의 유학에 나서서 지원해 준 일본인 지원자처럼 성파에게는 사진작가 문선호 선생의 후원도 있었다. 지방에 썩기에는 아까운 작가라고 하신 말처럼 속에는 비단. 회유가 달리 없진 않았다.
     
    성파는 끝끝내 서울의 미술계를 부러워하지 않고, 수월의 유훈인 조각공원을 떠올리며, 전업 조각가들이 겪는 불규칙 한 형편 속에서도 지켜 나갔다.
     
    끝으로 수월 선생의 말을 조사도 해보지 않았음에도, 과거 수월 선생이 브루델 제자에게서 배웠다는 말을 넘겨짚고 신중하게 알아 볼 이유도 없었고, 성파 자신이 로댕의 프린터 된 사진을 오려 액자를 손수 마련한 것이 이렇게 무거운 의미로 다가올 줄 몰랐을 것이다.
     
    글을 마치려고 할 때 수십 년 전 아버지가 직접 장만한 로댕의 사진 액자가 아들인 내 머리에서 떠오르니 희얀한 일이다.
     
    비록 프린터 사진이었지 만 제대로 보관해오지 않았다는 생각을 끝으로 글을 마친다.
    참고로 웹 검색에서 일본인 브루델 재자가 여러명 임을 시사하는 글들이 많았다.

    http://www.all-japan-arts.com/tyo…/1509.noushima/1509_3.html
    小森師は{構造社:구조사}で戦前{ブールデル:부르델}に学んだ{斎藤素厳に師事: 사이토 소원 사사}、具象彫刻一筋に貫いて平成元年に芸術院会員とな
    https://ja.wikipedia.org/…/%E6%97%A5%E5%90%8D%E5%AD%90%E5%A…
    {東京美術学校彫刻家塑造部:도쿄 미술 학교 조각가 소조 부 }へと{入学し首席: 입학 수석}で卒業。
    {斉藤素巌:사이토 소원}と共に{構造社:구조사}を結成。'사이토 소원'과 함께 '구조사'를 결성.

    찾아보면 나오지만, 김복진의 스승은 제국주의 기어 혹은 김복진은 친일 논란에 쪼금이라도 있으나, 사이토 소원은 제국주의 기어논란에 화두거리는 없고, 또한, '[PDF]식민지 '官展'의 실현'에서는 사이토 소원은 조선미술전람회 참가가 없다.
    수월선생도 친일이나 제국주의 논란이 안보이는 건 마찬가지 이다.
    故최용주 수월선생 구술http://www.silla.or.kr/gyeongju/people2.aspx
    이 와다나베씨는 청진과 경주를 왔다 갔다 하는 토목공사 업자였는데 우리 목공소와 거래를 한 사람으로 그 분이 나를 보고는 ‘이런 예술가가 전쟁에 나가 죽으면 국가적 손실이야’하면서 여기저기 손을 써서 나를 징용에 끌려가지 않도록 해준 은인

    히나코 지츠조(日名子實三)는 일본 군국주의 기념물에 동의한 전력이 있는 작가이다.
    평화의 탑은 기념물로 높이 37미터, 기기둥의 기초부분의 면적인 1070평방미터 당시 일본의 제일의 조각가인 「日名子実三」가 만들었다.

    한편으론 일제강점기때 예술장려를 한 조각가 이기도 하다.

    [PDF]식민지 '官展'의 실현
    조선미술전람회 23회(1944) 제1부 동양화伊東深水제2부 서양화寺内万次郎제3부 공예․조각日名子實三(조각 하나코 지츠조)六角紫水(공예)

    이왕가 미술관은 하나코 지츠조(日名子實三)의 작품을 매입 하였고 아직도 볼수 있다.

    꼬마시절 수월 선생의 계보가 이토록 큰 유산임을 모르고, 오늘날 불국사 문화회관 자리의 자택에서 뵜고, 경주박물관학교때 윤경렬 선생님과 아버지랑 한차에서도 타뵙고, 수차레 강단에서 만나 강우방 선생께 백률사 불입상을 소조로 특선도 받고 상패도 받았던 만28살 장무진 16년 4월 10일 한국 소조 근현대미술사 브루델 학파 기록 거의 全 마감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