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부터장용호로이어진다?

내가 각 미술대전에 그림을 위시해 조소는 주로 인체사실(기인한 추상으로 생각 구조적인 종이접기와 조소의 결합, 친환경 조소기법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로서)위주로서 전업작가로선 독창적인 작품세계가 나올때가 만약 온다면, 브루델의 조소 인체사실 계보가 한국에서 끈어지지 않고 온전히 전승되는 것 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부친으로서 스승이자 나의 조각스승인 성파 장용호선생은 나를 조각가로 만들기를 바랬고, 나의 첫시작이 경주박물관찰흙빗기(특선, 준특선 입선1회)였다. 나는 평범한 가정과 다른 환경속에서 평범함을 꿈궛지만 나역시 평범하지는 못했다. 나는 역사종교사회정치문화예술을 독학으로 공부한 끝에, 인간이 이승에 남기는 것을 최소화 하여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평범함을 꿈꾼다.
 하지만 은혜는 어느 정도의 선에서 갚고 파기해야 할지 그선에서 너무도 고민중에 있다. 왜냐하면 국가적으로 너무나 큰손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원하는 삶을 후원해주셨다. 하지만 가난했다. 이는 조각공원의 뜻을 수월선생께 염두한 결과로서 우리 모자는 궁핍하게 살았다. 너무 안타까워서 돕는 차원에서 아버지를 사사받는 것으로 내 창업자금을 이끌어주도록 요구했다. 나는 아버지와의 효성을 꿈궛지만, 나는 너무도 욕심이 많았다. 내가 군대휴가 때 내가 뭍는 질문에 세상에 너무도 늦게 부르델 계보를 내게 최초로 밝혔다. 나는 내가 사사받은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 충격을 받았다.
사실 부친은  문선호선생의 주선으로 일단 흉상을 맡겨본 권옥연화백은 너무도 감명받아서 지금 내가 사는 성건동 집을 그당시 90년대에 흉상값 천만원을 주시면서, 아버지를 후원하셨다.(즉 성파의 흉상값은 조각스승들에 비해 너무도 턱없이 저렴한 것이다.) 권옥연화백은 9촌 삼종숙부인 권진규선생의 불운을 죽을때까지 염두하며 세상에 복권 시키기로 마음먹고 권진규기념사업회도 하셧고, 더군다나 국립현대미술관에 박수근선생의 수상미달로 값어치가 폭등하기 전에 미리 소장권유를 하셨으니 미술계에서는 큰어른이시다. 
또한 초현실주의를 주창한 앙드레 브르통이 공언한 작가들은 모두 몇백억에 달하는 그림값으로 유명하다. 권옥연화백은 앙드레 브르통의 평을 받았음에도 세계순회를 거절하고 어머니와의 효성을 택한 세계 미술계에서는 있을수 없을 대사건의 주동자이시다. 그림도 성파의 작품도 너무 저렴하게 시장형성이 되어 있는 것이다.
돌아가시기 몇년전에도 친히 성파를 부르시면서 성파는 자신을 고백한바가 없었다는 것에서, 우리 한국조각사에서 큰 아쉬움을 남긴 것이다. 또한 권옥연화백이 바로 조각가로서는 권진규선생 다음으로 성파에게 평을 주신 것으로 이는 사실상 권진규선생을 예로 들어서 평을 주신 것이다.

이제 나는 아버지께 그 은혜로 권진규선생의 여동생으로 권진규미술관의 관장이신 사모님께 타계하기전에 예방드리려고 생각중이다. 권진규 선생이 말한 '내 자식'들을 조각공원화 시킨데 기어햐셨으니 우리나라 구상조각계의 채면을 살려주신 고마운 분이시다. 우리 수월선생의 성파의 가난하지 않은 가난함속에서도 지켜온 결실에 그 심정이 같다. 나와 같이 흉상을 해드리고 싶다.

 내가 전업작가를 하든 안하든 개인적으로는 김동우선생과 한미키 선생을 사사받고 싶지만 억제하고 있을뿐이다. 생계는 딱히 걱정하지 않게는 자신있지만, 나는 예술이 업보라고 생각하여, 결론은 약초나 농산물 가공쪽으로 창업준비에 있다. 즉 100%전업작가는 안하기로 한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는 조각가가 많다. 이는 국가적인 자산과 가치를 염두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미술계에 조금이라도 기어할 의향이 있기 때문에, 알려주는 것이다.)